근래의 한 포스팅에서 ‘취미로 시작한 일이 하나 있다’고 적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작점에는 의외로 오래된 제 관심사가 있습니다. 디자인과 예술, 그리고 에르메스의 까레.
오랜 이웃분들은 제가 까레를 좋아하는 이유가 단순히 아름다운 스카프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계실 겁니다. 한때 디자인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저는 까레를 통해 새로운 작가를 만나고 그들의 작업을 찾아보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에르메스 재단이 동시대 미술과 작가들을 지원하는 방식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관심의 한가운데 있었던 작가 중 한 사람이 서도호였습니다.
에르메스 미술상에서 서도호까지
2003년, 에르메스 코리아와 아트선재센터가 공동 주관한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의 최종 수상자로 서도호 작가가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아트선재센터에서 그의 국내 첫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한국 수묵추상의 거장 서세옥 화백의 장남으로 태어난 서도호는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공부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작업의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이후 그의 작업은 ‘집’, ‘공간’, ‘이동’, ‘기억’, ‘개인과 집단’ 같은 주제를 끊임없이 변주하며 이어졌습니다.

2012년 리움미술관의 《집 속의 집》,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전에서 선보인 작업들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을 만날 기회가 이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제게는 작품을 단순히 ‘보는 것’보다 조금 더 가까이 들어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며 하나의 작업을 시작할까.
완성된 작품이 되기 전에는 어떤 질문들이 있었을까.
그 질문들은 작업실에서 어떻게 형태를 얻어갈까.
20년 만에 다시, 아트선재센터
2024년, 서도호가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던 아트선재센터에서 다시 그의 개인전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SPECULATIONS)》가 열렸습니다. 이번 전시가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완성된 대표작을 나열하는 회고전의 형태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2005년부터 작가가 탐구해 온 생각과 프로젝트, 드로잉과 모형, 실험의 흔적들이 전시장 곳곳에 펼쳐졌습니다. 마치 한 작가의 머릿속과 작업실, 그리고 오랫동안 축적된 스케치북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듯한 전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저 같은 사람에게 한 번의 관람으로 충분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 전시 안으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
마침, 아트선재센터에서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를 위한 ‘도슨트 학교’를 운영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술 관련 일을 하는 분들에게 인기가 많을 프로그램이니 ‘되면 하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신청했습니다. 운 좋게도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수업에 들어가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만만치 않았습니다. 참가자 대부분이 이미 전문 도슨트로 활동하고 있는 분들이었고, 아트선재센터 교육팀의 수업 역시 꽤나 본격적이었습니다. 강의가 있고, 공부할 것이 있고, 과제가 있었습니다. 삼복더위 속에서 자료를 읽고 작품을 공부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 대학원에 다시 들어온 건가?
오랜만에 무언가를 제대로 공부하고 있다는 감각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각보다 꽤 좋았습니다.
설명하는 사람이 되어 다시 작품 앞에 서다
이 도슨트 학교는 교육만 듣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습니다. 전시 기간 실제 도슨트로 활동해야 정식 수료가 인정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사실 제게 ‘수료’라는 결과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프로그램을 준비한 교육팀과 함께 공부하는 예비 도슨트들을 보고 있자니 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이 전시에 힘을 보태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남은 전시 기간 동안 도슨트로 전시장에 서기로 했습니다.
수십 년 전에는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작가들의 작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후에는 까레 한 장을 통해 또 다른 작가와 작품을 찾아다녔고,
이제는 전시장 한가운데 서서 누군가에게 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전혀 다른 일처럼 보였던 것들이 이상하게도 하나의 선으로 이어집니다.
디자인을 공부했던 시간,
예술을 좋아했던 마음,
까레를 통해 발견했던 작가들,
그리고 도슨트.
어쩌면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것들이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24년 여름, 저는 그렇게 서도호의 작품 앞에 조금 더 가까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술의 감각이 삶의 결이 되어가는 순간을 기록합니다.



